입덕문 앞 AI 교육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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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덕문 앞 AI 교육문답

교육은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하는가. 이 오래된 질문은 인공지능이 지식을 대신 찾아주고 학습 방식까지 빠르게 바꾸는 오늘날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체계적인 교육을 국가 운영의 중요한 축으로 삼는 흐름은 유교가 한반도에 자리 잡으면서 본격화했다. 이후 교육 제도는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쳤고, 이제는 AI가 불러온 변화와 마주하고 있다.

울산 울주군의 언양향교는 이러한 교육의 흐름을 되짚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수백 년 전 지역 인재를 길러냈던 학교의 문과 강당, 제향 공간에는 당시 사회가 교육에 기대했던 가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배우는 내용과 방법은 달라졌지만, 교육을 통해 어떤 사람을 길러낼 것인가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언양의 옛 중심을 보여주는 향교

언양이라는 지명에서는 흔히 불고기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울산에서 경주나 밀양으로 이동할 때 지나게 되는 곳이자 영남알프로 향하는 길목이라는 인상도 강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습만으로 이 지역의 과거를 바라보면 뜻밖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오래전 언양에는 성과 관아가 있었고,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도 자리했다. 언양향교를 찾으면 커다란 돌에 새겨진 彦陽鄕校 네 글자가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이름은 언양향교지만 현재 행정구역상 위치는 울주군 삼남읍이다.

명칭과 현재 소재지가 다른 까닭은 이 일대의 행정구역이 오랜 세월에 걸쳐 변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언양읍과 삼남읍, 상북면 일대는 과거 언양이라는 하나의 생활권이자 행정권을 이루었다. 조선시대에는 언양현이 있었고, 1895년 언양군이 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울산군에 병합됐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작은 지역에 오래된 향교 하나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이곳은 하나의 고을이었으며, 고을의 학교가 들어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언양향교는 단순한 옛 건축물이 아니라 지역 행정과 교육이 함께 작동했던 시간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긴 학교

언양향교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처음에는 반월산 아래에 세워졌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고, 이후 다시 화장산 아래로 이전한 뒤 현재 위치로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학교가 한 장소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닌 셈이다.

1696년에는 대성전을 중수했으며, 1700년에는 명륜당과 동재·서재를 다시 세웠다. 오랜 기간 건물을 고치고 자리를 옮기면서도 교육과 제향의 기능을 이어왔다.

학교의 이전과 통폐합이 오늘날에도 지역사회의 주요 관심사가 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향교의 이건 기록은 먼 과거의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는다. 시대와 제도는 달라졌지만, 사람들이 모여 배우는 공간에는 위치와 운영을 둘러싼 문제가 늘 따라왔다.

덕으로 들어가는 입덕문

언양향교에 들어설 때 만나는 문에는 입덕문 入德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덕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현대 학교의 교문과 비교하면 다소 거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 교육이 지향했던 가치가 담겨 있다.

당시 교육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만드는 데만 목적을 두지 않았다. 시험을 위한 지식 습득을 넘어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지를 배우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실제 교육 현장이 언제나 그 이상과 일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학교의 첫 문에 붙인 이름을 통해 그 사회가 교육에 무엇을 기대했는지는 확인할 수 있다.

향교 한쪽에는 공자상도 세워져 있다. 유교와 공자, 명륜당과 대성전 같은 표현은 자칫 역사 교과서 속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AI 시대를 맞아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지 다시 묻게 된 지금, 입덕문에 담긴 교육관은 현재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

30명이 공부한 지방 관학

입덕문을 지나 향교 안으로 들어가면 중심에 명륜당이 자리한다. 명륜은 사람 사이의 도리를 밝힌다는 의미다. 오늘날 학교 건물의 일반적인 이름과 비교하면 교육 목적을 직접 드러낸다는 점에서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조선시대 언양향교에는 교관 한 명이 있었고 교생 정원은 30명이었다고 전한다. 국가로부터 토지와 책 등을 지원받아 운영된 지방의 관학 교육기관이었다. 현재의 기준에 빗대면 약 30명의 학생이 공부하던 작은 공립학교와 비슷한 규모였던 셈이다.

그 시절에도 시험을 잘 치르고 싶은 학생과 출세를 바라는 학생이 있었을 수 있다. 공부보다 바깥에서 놀고 싶어 하던 학생도 있었을지 모른다. 구체적인 개인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향교 역시 사람이 모여 가르치고 배우던 생활 공간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가의 지원을 바탕으로 지역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언양향교는 당시 공교육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고을의 학생들이 같은 공간에서 경전을 읽고 사람 사이의 도리를 익혔다는 사실은 교육이 지역 공동체의 중요한 기반이었음을 드러낸다.

배움과 제향이 이어지는 구조

명륜당을 지나 뒤쪽으로 올라가면 공간의 성격이 달라진다. 언양향교는 앞쪽에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을 두고, 뒤쪽의 높은 곳에는 제향 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했다. 이를 전학후묘 前學後廟 형식이라고 한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유학의 성현들을 모셨다. 오늘날의 학교와 비교하면 낯선 구조다. 앞쪽에서 공부한 뒤 뒤편으로 올라가면 자신이 배우는 학문의 뿌리가 된 인물들을 기리는 공간이 나타난다. 지식을 배우는 장소와 그 지식의 근원을 기억하는 장소가 하나의 울타리 안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학교에서는 유학 경전을 읽었다. 오늘날 학생들은 수학과 영어, 과학을 배우고 코딩과 인공지능까지 공부한다. 교육 내용은 크게 달라졌지만, 학교가 한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 성장시킬 것인지를 고민하는 공간이라는 본질적인 질문은 남아 있다.

오래된 건물에 남은 배움의 시간

언양향교를 천천히 살펴보면 건물의 색채도 눈에 들어온다. 붉은 기둥과 푸른 창호가 대비를 이루고, 오래된 기와지붕 아래에는 긴 세월의 흔적이 쌓여 있다. 화려한 관광지처럼 북적이거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 장소와는 다른 모습이다.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명륜당과 대성전, 입덕문은 오래된 학교의 성격을 차분하게 드러낸다. 방문객은 앞쪽의 교육 공간에서 뒤쪽의 제향 공간으로 이어지는 배치를 따라 걸으며 조선시대 향교가 지식과 가치를 함께 다루었던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언양은 과거보다 행정적인 규모가 작아졌다. 언양현은 사라졌고 언양군도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고을에서 사람을 가르치던 공간은 지금까지 남았다. 언양향교는 1997년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으며, 현재도 봄과 가을에 석전이 이어지고 있다.

AI 시대에 다시 묻는 교육의 역할

가을의 언양향교에서 입덕문을 지나면 오래된 교육 공간과 오늘날의 학교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수백 년 전 이 문을 통과했던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이 살아가던 시대의 변화와 다음 세대의 교육은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AI가 필요한 지식을 찾아주고, 정보를 익히는 방식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이에 따라 학교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더욱 커지고 있다. 조선의 향교가 지식의 습득뿐 아니라 사람의 태도와 도리를 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내세웠다는 점은 이 질문을 생각하게 한다.

지식을 얻는 수단이 달라져도 교육이 사람의 성장을 다룬다는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언양향교의 입덕문과 명륜당은 과거 교육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AI 시대의 학교가 지식과 함께 어떤 가치를 가르쳐야 할지 되묻게 한다.

오래된 향교에서 마주하는 가장 현대적인 물음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지식을 찾는 방법이 크게 달라진 시대에도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로 성장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하지 않겠는가. 언양향교는 그 질문을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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