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뒤에 숨은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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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뒤에 숨은 혐오

놀이의 얼굴로 번진 혐오 표현

혐오 표현이 무거운 주장 대신 웃음과 유행어, 응원 구호의 형태로 확산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지난 8월 26일 한 방송사의 시사 유튜브에서는 정당 약칭을 두고 “다 사형당할 것 같은데”라는 발언이 나왔고, 출연자들이 함께 웃었다. 이 발언은 박정희 정권 당시 인혁당 사건과 사법살인의 역사를 끌어온 표현이었다. 제작진은 이후 해당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열흘간의 소요 사태’로 규정하는 발언이 나온 포럼을 개최한 의원에 대해 제명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가결됐다. 해당 의원은 자신의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했다. 결의안 가결은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앞서 지난 6월에는 고교야구 경기장에서 배재고 선수들이 상대 학교를 향해 5·18민주화운동을 조롱하는 구호를 외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을 학생들의 일탈만으로 볼 수는 없다. 5월 18일에 맞춰 ‘탱크데이’ 행사를 열고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로 상품을 판매한 기업이 있었고, 방송과 국회에서도 역사적 비극을 가볍게 다루는 장면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련의 사례에서 공통으로 드러난 점은 혐오가 이벤트와 응원, 예능과 축하의 형식을 빌렸다는 사실이다. 혐오 표현은 더 이상 무거운 주장으로만 유통되지 않는다. 밈과 유행어, 놀이처럼 소비되면서 경계심을 낮추고 빠르게 퍼진다.

장난이라는 말이 만드는 두 겹의 방패

놀이의 형식은 혐오 표현에 두 겹의 방패를 제공한다. 먼저 책임을 흐린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장난인데 예민하다”는 반응으로 행위의 의미와 피해를 축소할 수 있다. 다음으로 참여의 문턱을 낮춘다. 관련 역사에 대한 이해나 뚜렷한 신념이 없어도 다른 사람을 따라 웃고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혐오 표현에 동참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혐오는 아동과 청소년에게 빠르게 도달할 수 있다. 학생들은 학교 밖의 유튜브와 숏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혐오 표현을 반복적으로 접한다. 이후 또래 집단에서 친밀감이나 소속감을 드러내기 위한 말로 이를 사용할 수 있다. 혐오의 의미를 확신해서라기보다 해당 표현이 어떤 역사와 희생을 바탕에 두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어울리기 위해 따라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조사에서는 교사의 89.8%가 학교 안의 혐오 표현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성을 둘러싼 시비와 민원 부담 때문에 관련 문제를 수업에서 다루기를 주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이 혐오 표현을 접할 통로는 넓어진 반면, 그 의미와 피해를 배울 기회는 충분히 열리지 않은 셈이다.

혐오를 논란으로 부를 때 생기는 문제

혐오 표현을 단순한 ‘논란’으로 부르는 언론의 관행도 문제로 제시됐다. 지난 30여 년간 제목에 ‘논란’이 포함된 언론 기사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정책과 관련한 논란 기사는 줄어든 반면, 사회면에서 차별과 혐오 발언을 논란으로 규정한 기사는 두드러지게 늘었다.

‘논란’은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운 사람들이 다투는 상황을 뜻한다. 혐오 발언에 이 표현을 붙이면 문제의 중심이 발언 자체와 그 피해에서 찬반 대립으로 옮겨갈 수 있다. 혐오 발언은 한쪽의 주장이 되고,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반대편의 주장처럼 배치된다. 그 과정에서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흐려지고, 놀이로 가벼워진 혐오가 하나의 정당한 의견처럼 취급될 가능성이 커진다.

의견의 지위를 얻은 혐오는 다시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보호를 요구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권리와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세계인권선언의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세계인권선언이 제시한 자유의 조건

세계인권선언은 제1조부터 제27조까지 인간의 권리를 열거하고, 마지막 세 조항에서 그 권리가 성립하는 조건과 책임을 밝히고 있다.

  • 제28조는 선언에 규정된 권리와 자유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제시한다.
  • 제29조는 모든 사람이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 가능한 공동체에 의무를 지며, 권리를 행사할 때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기 위한 법률상 제한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한다.
  • 제30조는 선언의 어떤 조항도 선언에 규정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하려는 행위를 할 권리로 해석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기 위한 자유는 자유의 권리 목록에 포함될 수 없다. 혐오 표현은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을 내세우더라도 특정한 사람에게서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자격과 존엄을 빼앗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혐오에 대응하는 일은 자유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를 지키는 일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처벌을 넘어 사회적 기준 마련해야

놀이로 확산한 혐오를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처벌하는 방식은 대응 시점이 늦고, 책임이 가장 약한 위치의 사람에게 집중될 수 있다. 학생들의 구호만 문제 삼는다면 그보다 앞서 혐오를 상품과 방송, 정치적 발언의 형식으로 유통한 사회적 환경을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필요한 것은 혐오 표현을 판단할 분명한 기준이다. 무엇이 혐오 표현인지 법률로 정의하고, 인권 교육을 선택적인 배려가 아니라 국가가 수행해야 할 의무로 제도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된다. 국가가 명확한 기준을 세우면 언론과 학교, 기업, 정치권도 혐오 표현을 단순한 논란으로 부르며 판단을 미루기 어려워진다.

어떤 표현이 사람의 존엄을 해치고 공동체가 경계해야 할 행위인지 사회적 합의를 세우지 못하면, 혐오는 다시 재미있는 놀이와 유행의 얼굴로 돌아올 수 있다. 인권기본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러한 악순환을 막고, 자유와 인권이 함께 존중되는 사회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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