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밤길이 품은 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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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강 밤길이 품은 세 시간

울산 도심에서 저녁 산책을 계획한다면 태화강 동굴피아에서 남산 인공폭포를 거쳐 십리대숲을 바라보는 길을 따라갈 만하다. 남산의 숲과 태화강이 나란히 이어지는 이 구간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동굴, 되살아난 강,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킨 대숲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해가 기울면 담장을 따라 설치된 줄 전구에 불이 들어오고, 아래쪽 조명을 받은 가로수 잎은 연둣빛을 띤다. 한쪽에는 남산의 숲이 자리하고 다른 쪽에는 도로와 태화강이 펼쳐진다. 산과 도시, 강이 한 길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저녁을 맞는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품은 동굴

태화강 동굴피아는 처음부터 관광객을 맞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다. 1942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울산 비행장을 군용 비행장으로 바꾸면서 군량미와 항공유를 보관할 목적으로 남산 자락에 굴을 팠다. 굴을 만드는 작업에는 신정동 일대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굣길의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책보자기에 곡식을 담아 나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학생들이 책을 싸던 보자기에 수탈한 곡식을 담아야 했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해방 이후 동굴의 쓰임은 여러 차례 달라졌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간이주점으로 이용됐고, 집이 없는 사람들의 거처나 굿당이 되기도 했다. 군수물자를 숨기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 시대와 이용자의 사정에 따라 생활의 터전과 의식의 장소로 바뀐 것이다.

울산 남구청은 네 개의 굴을 약 4년에 걸쳐 정비한 뒤 2017년 여름 태화강 동굴피아를 개장했다. 네 굴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약 180미터이며, 산을 완전히 관통하지 않고 안쪽에서 돌아 나오는 구조다. 관람객은 들어갔던 방향으로 다시 나와야 한다.

역사에서 빛으로 이어지는 전시

제1동굴은 일제강점기 울산 주민의 생활과 강제 노역을 살펴보는 역사관으로 구성됐다. 내부에는 소나무에서 추출한 송탄유를 담았던 통을 비롯해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놓여 있다.

다음 동굴부터는 빛과 그림을 활용한 공간이 이어진다. 동물 모양 조명이 반짝이는 길을 지나면 관람객이 그린 물고기가 화면 속을 헤엄치는 아쿠아리움형 체험 공간이 나온다.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구간도 마련돼 있다. 전체 동선은 어두운 역사 공간에서 출발해 빛이 채워진 전시로 이동하도록 구성됐다.

운영 종료 시간이 지나면 매표소에는 입장 마감 안내가 게시된다. 태화강 동굴피아의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입장은 오후 5시 30분에 마감된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학이 알을 품는 광장

동굴에서 위쪽으로 걸으면 학이 알을 품는 광장과 원형 분수를 만난다. 날개를 펼친 두 마리 학이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으며, 발아래 둥지에는 알이 놓여 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분수 가장자리의 간접조명이 켜진다. 노란빛은 둥근 돌바닥 위로 번지고, 분수의 물은 가장자리를 따라 조용히 흘러내린다. 과거 물자를 빼앗아 저장하려고 팠던 동굴 앞에 생명을 품는 학의 모습이 자리한다.

동굴은 수탈의 역사를 전하는 시설로 보존됐고, 그 앞의 광장은 시민이 머무는 휴식 공간으로 정비됐다. 과거의 흔적을 없애지 않으면서 현재의 생활 공간으로 되돌린 점이 태화강 동굴피아의 특징이다.

남산 인공폭포와 바위 정원

광장에서 조금 더 이동하면 남산 인공폭포가 나타난다. 조명을 받은 바위벽 아래로 물이 흐르고, 수면 위에는 작은 불빛이 촘촘하게 비친다. 산책로 주변의 어둠과 폭포 조명이 대비돼 저녁 풍경을 만든다.

공원 한편에는 남산의 드러난 암반을 비추는 정원도 있다. 사람이 깎아낸 바위 표면은 조명을 받으며 굴곡과 결을 드러낸다. 동굴과 광장, 폭포, 암반 정원이 가까운 동선 안에서 차례로 이어진다.

도시와 강을 잇는 그림 통로

남산에서 태화강변으로 내려가려면 도로 아래의 지하 연결로를 지나야 한다. 계단을 내려가면 통로 벽을 가득 채운 타일 그림이 나온다. 고래와 돌고래, 무지개와 울산을 나타내는 영문 글자가 수백 장의 타일 위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반듯하게 정리된 그림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그린 듯한 선과 색이 이어진다. 천장에는 커다란 푸른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도로의 차량 소리는 통로 안에서 점차 멀어지고, 벽과 천장을 채운 바다 그림은 남산과 태화강 사이를 연결한다.

통로 끝의 네모난 출구를 지나면 태화강과 십리대숲의 풍경이 펼쳐진다. 가을 저녁의 강가에서는 산 쪽과 다른 바람이 불고, 건너편 아파트와 건물의 불빛은 수면 위로 길게 번진다. 산책하는 시민들이 강변 길을 오가며, 구름 사이로 남은 노을빛은 물결 위에서 작게 부서진다.

죽음의 강에서 시민의 강으로

태화강은 한때 공업지구에서 흘러든 폐수로 인해 죽음의 강이라고 불렸다. 2000년대 들어 시민과 행정이 함께 복원에 나섰고, 이후 1급수 기준을 충족하는 강으로 되살아났다.

태화강의 변화는 훼손된 자연도 시민의 참여와 꾸준한 행정의 노력으로 회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녁이면 산책로를 걷는 사람들과 수면 위에 비치는 도심 불빛이 강의 달라진 모습을 드러낸다.

강 건너 십리대숲에는 대나무 약 50만 그루가 4킬로미터 가까이 이어진다. 조선시대부터 이곳을 지켜온 숲으로 알려져 있으며, 밤에는 대숲 안에서 은하수길의 불빛이 별처럼 빛난다. 강변에서는 대나무 사이로 새어 나오는 초록빛 조명을 바라볼 수 있다.

물을 끌어올리던 탑의 변신

강 상류 쪽에는 태화강 전망대가 보인다. 이 시설은 1963년 공장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취수탑이었다. 기능을 멈춘 뒤 오랫동안 방치됐지만 2009년 전망대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물을 끌어올리던 산업시설은 이제 태화강을 바라보는 공간으로 쓰인다. 동굴이 역사와 체험 공간으로 바뀌고, 오염됐던 강이 시민의 산책 공간으로 회복됐으며, 취수탑은 전망대로 다시 활용되고 있다. 기존 시설을 철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공공 공간으로 되살린 흐름이 태화강 주변 곳곳에서 확인된다.

한 길에서 만나는 세 개의 시간

태화강 저녁 산책길에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시간이 겹쳐 있다. 첫 번째는 곡식과 항공유를 숨기기 위해 파낸 동굴의 시간이다. 두 번째는 산업화 과정에서 오염됐다가 시민과 행정의 노력으로 회복된 강의 시간이다. 세 번째는 수백 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바람에 흔들려온 대숲의 시간이다.

이 세 장소는 모두 사람의 선택과 시대의 변화 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남산의 야경 아래에는 일제강점기의 기억을 보존한 굴이 있고, 도로 아래에는 어린이들의 고래 그림이 이어진다. 그 통로를 지나면 되살아난 태화강과 오래된 십리대숲이 나타난다.

태화강 동굴피아에서 십리대숲으로 이어지는 길은 울산의 과거와 회복, 현재의 일상을 한 번에 살펴볼 수 있는 도심 산책로다. 화려한 야경만 보는 길이 아니라 도시가 지나온 시간을 차분히 확인하는 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분명하다.

방문 정보

태화강 동굴피아울산광역시 남구 남산로 306
운영시간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 마감오후 5시 30분
휴관일매주 월요일
입장료어른 2000원 청소년과 군인 1500원 어린이 1000원
태화강 전망대울산광역시 남구 남산로 223
운영시간계절별로 다름
입장료무료
태화강 국가정원 십리대숲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태화강 밤길이 품은 세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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