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동헌과 내아, 학의 도시 역사 품다
울산 원도심의 역사적 관청, 동헌과 내아
울산광역시 중구 원도심에는 조선 시대 울산의 행정 중심지였던 동헌과 내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985년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이 건물들은 옛 울산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적 공간입니다.
가학루와 동헌의 건축미
동헌의 정문인 가학루(駕鶴樓)는 ‘학이 날아오는 아름다운 누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익공 양식이 돋보입니다. 모로단청으로 장식된 이 누각 2층 마루에는 큰 북이 놓여 있어 당시의 위엄을 느끼게 합니다.
울산의 역사적 중요성
울산은 예로부터 군사, 상업, 해운의 요충지이자 신라의 관문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에 따라 수령의 권한도 막중했으며, 동헌은 수령이 정사를 보던 관청 건물로서 행정의 중심이었습니다. ‘헌(軒)’은 마루가 있는 집을 뜻하며, 동헌은 동쪽의 큰 집이라는 의미로 울산 행정을 담당하는 중심 건물을 의미합니다.
조선 성종 7년 축조된 울산 읍성과 동헌
경상좌도의 요충지였던 울산 중구 일원에는 조선 성종 7년(1476)에 축조된 울산 읍성과 그 안에 동헌이 있었습니다. 동헌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절을 올리는 삭망례(朔望禮)가 거행되었습니다. 전패는 왕의 상징으로 분실이나 훼손 시 엄중한 처벌이 따랐습니다.
동헌의 구조와 역사적 변천
동헌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단아한 기와지붕이 특징입니다. 원래 객사에는 ‘학성관(鶴城館)’ 현판이 걸려 있었으며, 임진왜란 말기 정유재란 때 왜군이 읍성 돌을 헐어 울산왜성 축조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12월에는 발굴 조사와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울산읍성길과 동헌의 역할
2010년 조성된 울산읍성길은 북정동, 성남동, 옥교동을 잇는 골목길로 서문지 터, 남문지 터, 주작대로, 우물터, 가옥 터, 동헌, 객사 터를 연결합니다. 동헌 마당은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재판이 열리던 장소로, 수령의 부임 행사와 청렴의 상징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내아의 구조와 기능
수령의 살림집인 내아(內衙)는 8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로 온돌방 3칸, 대청 2칸, 부엌과 누마루가 각각 1칸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내아는 관청 건물과 구분하기 위해 담장이 없는 점이 특징이며, 향리들의 업무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가 단아하게 배치되어 조선 시대 생활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학의 도시 울산과 동헌의 상징성
울산은 고고함과 청렴, 장수와 다복을 상징하는 학이 날아다니던 ‘학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헌의 명칭도 일학헌(一鶴軒), 반학헌(伴鶴軒) 등 학과 관련된 이름을 지녔으며, 정문 가학루와 객사 학성관 역시 학을 상징합니다. 이는 백성을 위해 청렴하고 강직한 통치를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수령들의 공덕비와 역사적 인물
동헌 뒤에는 울산에 재임했던 수령들의 공덕을 기리는 선정비, 영세불망비, 거사비, 애휼비, 타루비 등 다양한 비석들이 줄지어 서 있습니다. 특히 이도재 거사비는 1883년 경상좌도 어사로 파견된 이도재가 언양 현감과 울산부사의 폐정을 적발한 공로를 기립니다. 이도재는 공평무사한 일 처리로 칭송받았으며, 동학혁명 진압에도 참여했습니다.
효자 송도 선생 정려비와 울산의 유교 정신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인 효자 송도 선생 정려비와 홍살문도 동헌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효행으로 유명한 송도 선생은 병든 부모를 10여 년간 정성껏 간호했으며, 유교식 예법에 따라 사당을 세워 모셨습니다. 이 정려비는 원래 효문동에 있었으나 2006년 동헌으로 옮겨졌습니다.
울산 동헌과 내아, 전통과 정신의 공간
울산 동헌과 내아는 세월의 흔적 속에서도 공정과 청렴, 백성을 위한 통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공간입니다. 태화사지 십이사장 사리탑과 고풍스러운 기와지붕의 아름다움이 전통의 품격과 따뜻한 인간애를 전하며, 울산의 역사와 문화를 잇는 상징적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위치는 울산광역시 중구 동헌길 167에 위치해 있습니다.
